2019년 8월 26일(월)

[기자노트] 말할 권리와 들을 의무


입력날짜 : 2017. 10.24. 09:57

[1733호]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전형적인 ‘공무원’의 모습이 있다. 작가 한 명만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최근 한 영화에서 공무원이 주인공으로 공무원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줬던 영화가 있었다. ‘위안부 문제’를 감동적으로 그려냈다는 호평을 받고 있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다.

영화는 처음부터 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잦은 민원제기로 악명(?)높은 ‘도깨비 할매’ 나옥분 할머니와 ‘원칙’을 고수하며 할머니와 적수가 되는 9급 공무원 박민재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나옥분 할머니는 구청 공무원들에게는 매일같이 민원제기를 하는 골치 아픈 존재였지만, 어찌 보면 사소한 불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하는 권리의식이 높은 주민이었다. 또 민원 내용도 자신의 이익이나 불편함때문이 아니라 그가 오랜 시간 정붙이고 살았던 시장과 그 시장 사람들을 위한 것들이었다. 물론 시장사람들조차 그것을 알아주고 고마워하기보다는 사사건건 간섭하고 참견하는 피곤한 노인네로 치부해버리곤 했다.

박민재가 전보오기전까지 구청 공무원들은 ‘도깨비 할매’가 오면 다른 일들을 하기 바빴다. ‘바쁜 척’을 하며 피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원칙주의자 박민재는 ‘번호표를 뽑으라’, ‘번호표를 한 장만 뽑아라’, ‘서류를 작성하라’는 등의 원칙과 절차를 요청하며 ‘응대’한다.

그러던 중 시장 재개발을 놓고 개발사업자와 시장 사람들간의 갈등이 깊어지자 구청장 이하 공무원들의 고민도 깊어진다. 재개발은 해야겠고 시장 주민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던 구청장에게 박민재는 한 가지 묘책을 제시한다.

바로 주민들의 민원을 받아들여 재개발을 중단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사업자는 불복소송을 하여 ‘승소’해서 적법하게 재개발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민들에게는 구청이 ‘주민들의 편’에서 행정명령까지 내렸다는 것으로 인심을 얻고 뒤로는 ‘적법하게’ 개발사업자가 승소하게 돕는다는 구상이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면피’가 가장 중요한 공무원 사회에 대한 작가, 일반의 인식이었다. 심지어 공무원 과장을 통해 공무원의 신조가 ‘나대지 말자’, ‘복지부동’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다가 재개발 반대 등 시장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발 벗고 나섰던 할머니가 실은 위안부 생존자였던 것, 그 사실을 숨긴 채로 혼자 외롭게 살면서 시장과 시장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오지랖’이 되고 지나치리만큼 민원을 제기해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시장 사람들과 구청직원들의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박민재는 ‘소송(분쟁) 중 재개발은 할 수 없다’는 원칙으로 용역들의 철거와 폭력에 맞섬으로써, 일전에 그가 개발사업자에 무조건 유리한 소송 아이디어를 낸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또 나옥분 할머니가 무사히 미국 청문회에서 영어증언을 할 수 있도록 영어를 가르치는 것에서 나아가 나옥분 할머니의 ‘증인적격’이 문제되자, 구청 직원과 구민들에게 서명을 받고 구청장을 설득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려 애썼으며, 할머니를 도우러 직접 미국행까지 감행하는 등 그의 변화된 모습이 그려진다.

이처럼 영화는 위안부 할머니가 민원제기에서 나아가 위안부 증언과 사과요구를 하기까지 그를 돕는 공무원과의 스토리인 동시에, 한 공무원이 원칙과 절차를 고수하면서도 ‘국민을 위한 봉사자’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는 ‘나는 말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의 말임과 동시에 ‘나는 말(증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옥분 할머니는 그간 숨겨왔던, 어쩌면 가장 말하고 싶었던 ‘위안부 증언과 사과요구’를 하기 전까지도 그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말해왔다. 민원을 제기하는 것은 그의 말할 권리의 실현에 다름 아니었다.

반면 들을 의무가 있었던 공무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회피해 왔다. 민원 해결을 위한 노력 등의 실질적 의무는 고사하고 ‘원칙’과 ‘절차’라는 형식적 의무조차 이행하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결국 영화에서는 한 민원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동정 때문에,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깊은 공감 때문에 그를 돕는 모습으로 변모되는 공무원들의 모습을 그려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복지부동’하지 않고 ‘나대는’, 즉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공무원들의 모습이 공무원의 ‘전형’이 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정인영 기자 news@kgos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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